칠판화, 바닥화…세계를 꿰뚫어본 ‘현실의 그림’들이 찾아왔다
대형 갤러리에 한 여인이 조용히 다림질을 하는 그림이 펼쳐졌다. 그 뒤편으로 세계지도로 뒤덮인 벽과 찬란한 윤슬이 비치는 강물의 동영상이 흘러간다. 또 다른 전시장 들머리에는 부처와 나란히 앉은 알몸 여인이 눈을 감고 수행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반도체 회로기판 위에 배치된 노동자들이 꼼지락거리며 몸짓하는 화면들도 지나간다.
지금 서울 북촌 주요 화랑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기기묘묘한 그림들의 면면이다. 이런 도상들을 내세운 중견 리얼리즘 작가들의 근작 전시회가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직설적으로 현실의 풍경과 인간상을 묘사하는 차원을 넘어선 파격의 작품들이 상당수 나왔다. 작가 자신과 주변의 삶을 성찰하며 상징적·은유적인 화면을 빚어내거나 과거 작업의 문제의식과 활력을 현 시점에서 되새김하며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려는 작업들이다. 그림 속 도상들은 어떤 의미와 맥락 아래 그려진 것일까를 짚어보는 재미가 적지않다.
가장 큰 화제를 모은 건 사간동 갤러리 현대의 김명희 개인전 ‘깊은 시간’(14일까지)과 소격동 학고재의 이종구 개인전 ‘사유’(20일까지)다. 모더니즘의 맥락에서 리얼리즘의 형식과 기억의 문제를 깊이 성찰해온 김 작가와 농민화의 대표 작가로 현실비판적 리얼리즘에 충실한 그림을 그려온 이 작가는 확연히 다른 결을 지녔다. 그럼에도 두 전시는 풍경과 인물에 대한 극사실적인 묘사와 도상을 중첩·병치시키는 얼개 등에서 서로 맥락이 닿으면서 흥미롭게 비교할 만한 유사점과 차별점을 보여준다.
김 작가는 인간 문명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지도 얼개의 우주적 화면에 담았던 김차섭(1940~2022) 작가의 배우자였다. 1970년대 미국 뉴욕으로 남편과 함께 이주해 목탄 드로잉과 유화로 작업을 시작한 그는 1990년 돌아와 춘천 폐교를 작업실 삼아 국내외를 유랑하면서 영상 미디어아트와 결합한 특유의 칠판 회화를 창작했다. 전시에는 그가 30여년간 삶과 세계를 돌아보고 기억하며 성찰한 흔적을 담은 칠판 회화들이 딸림 영상, 과거 1980년대의 드로잉 소품들과 함께 나왔고, 최근 만든 작가의 다큐 영상도 볼 수 있다.
그의 칠판 회화는 30여년간 작업실 주변과 바깥의 미국, 중앙아시아 등지를 돌아다니며 본 것들과 유년 시절에 어린 사건들, 출생 전 과거의 원초적인 이미지들에 대한 시공간의 기억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런 기억의 도상들을 작가는 오일파스텔의 몽글거리는 점과 선들을 통해 세밀화처럼 핍진하게 묘사한다. 400여년 전 카라바조와 벨라스케스의 바로크 회화를 떠올리게 하는, 빛과 어둠으로 아롱진 칠판 회화의 화폭에서 작가는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을 가르면서 그립고 설레이는 풍경과 인물의 군상들을 그려낸다. 저 유명한 벨라스케스의 걸작 ‘시녀들’에서 시도됐던 그림 속 그림의 이중적 구조를 빗방울 뿌리는 차창이나 강물 위 부유물에서 벌이는 퍼포먼스의 몸짓, 햇빛을 반사하는 강물의 윤슬 등의 동영상을 함께 배치하며 변주한 것은 회화의 틀거지를 새롭게 사유하려는 독창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을 보거나 읽는 것은 일종의 지도를 보는 독도법과 비슷한데, 암호 풀기처럼 어렵다기보다 그의 삶 언저리에 펼쳐낸 생활과 생각의 우주를 담담하게 헤쳐가는 길에 더 가까워 보인다.
1980~90년대 민중미술 계열의 농민화 작가로 유명했던 이 작가는 8년 만에 차린 개인전을 통해 한국 불교미술사의 걸작 반가사유상, 백제관음상 등을 근래 암 투병 생활을 했던 자신의 자화상, 여인의 알몸 수행상, 불꽃, 강아지 등과 대비시킨 명상적인 근작들을 내걸었다. 2018년 개인전에서 촛불 혁명이 벌어진 광장의 격정을 직설적으로 담았던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불가의 종교적 상징물을 대거 끌어들이면서 피안과 사유의 세계로 관심을 넓히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이런 변화는 이미 지난 2015년 남도 고찰 미황사를 답사하면서 그린 일련의 작품들에서 드러난 바 있지만, 이번 전시는 이후 작가가 겪은 병고의 체험과 얽히면서 화풍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절실한 모색의 과정으로도 비친다.
서촌 통의동 전시 공간 유스퀘이크에 마련된 정복수 작가의 ‘욕망의 해부’전(7월8일까지)은 청년 작가 시절인 1980년대의 문제작을 조명한다. 잘리고 벗겨진 인간의 몸덩이를 집요하게 그리며 존재의 욕망을 탐구해온 작가의 화력에서 가장 날 선 감각을 선보였던 시절의 작품들이다. 성기를 드러낸 남녀 알몸들이 널브러진 구도의 큰 화폭을 관객이 밟고 감상하는 틀거지로 1979년 첫 전시 당시 큰 논란을 일으켰던 ‘바닥화’를 벽면에 내걸어 전모를 공개했고, 근육, 혈관, 내장 등을 드러낸 신체 조각들을 달아맨 ‘존재의 초상’ 연작들도 나왔다.
1985년 민중미술 운동이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던 ‘힘’전 철거 사태의 주역인 손기환 작가는 서울 성수동 헬로우뮤지움에 개인전 ‘판도라의 상자’를 차렸다. 만화·영화·대중매체 속 전쟁 이미지를 통해 형성된 ‘유년의 감각 기억’을 구작과 근작 회화로 풀어냈다. 산업의 거대 구조 속에 소외된 노동을 공사장 조감도나 반도체 집적회로 위에 놓인 노동자들의 군상을 표현하는 구도로 표현해 주목받은 박은태 작가도 관훈동 관훈갤러리에서 ‘부품의 대가―사람들’이란 제목의 개인전(20일까지)을 열었다. 1980~90년대 노동자 군상들의 비극적 상황을 초현실적 구도로 풀어냈던 구작들과 추상적 이미지가 들어간 근작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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