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의 언어’로 괴물을 이길 수 없다 [세상읽기]
우리 정치는 여야의 대립으로 포장되었지만, 실상은 서로의 존재에 기대어 생명을 연장하는 ‘적대적 공생관계’의 모습에 가깝다. 이 메커니즘의 핵심 동력은 다름 아닌 ‘공포’다. 한쪽 진영의 결집력이 단단해질수록 그 에너지는 반대편 집단의 위기감을 자극한다. 상대 집권에 대한 공포는 방어기제를 촉발하며 건너편 진영의 결집력을 무섭게 응집시킨다. 서로를 악마화할수록 내부의 결속은 공고해지는 이 악순환 속에서, 정치는 합리적인 대안 경쟁 대신 ‘공포의 시소게임’만을 무한히 반복하고 있다.
이 역설적 공생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택할 수 있는 시도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아예 반대편을 지워버리는 ‘절멸’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포용’이다. 지난 윤석열 정부가 집요하게 걸었던 길은 전자였다. 야당을 국정의 상대로 인정하기보다, 절멸의 대상으로 삼아 정치 무대에서 소거하려 했다. 내란까지 이어진 이 절멸 시도는 결국 실패로 귀결되었다. 반대편을 찍어 누르려는 폭주는 민주 진영에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가장 강력한 저항 명분과 설득력을 쥐여주었고, 국민 다수의 경각심을 자극해 도리어 콘크리트 같은 결집을 낳았기 때문이다. 없애려 할수록 상대의 생명력만 연장해준다는 잔혹한 역설이 다시 증명된 셈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자연스럽게 반대편으로 향한다. 윤석열의 ‘절멸 정치’가 실패했다면, 지방선거를 치른 민주당과 진보 진영은 과연 ‘포용의 정치’와 수용성을 보여주고 있는가? 불행히도 현실은 깊은 의구심과 우려를 자아낸다. 소위 진보 진영의 일부 정치인들과 대형 유튜브 채널들은 과거 극우 세력이 전유했던 혐오와 배제의 문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급기야 얼마 전에는 ‘땡크’로 밀어버려야 한다거나 ‘몽둥이’를 들어야 한다는 식의 귀를 의심할 만한 거친 표현까지 등장했다. 이를 두고 그동안 극우 세력이 행한 거친 공격에 대한 불가피한 ‘미러링’이라 말할지 모른다. 저들이 무도하게 칼을 휘두르니 우리도 똑같은 방식으로 맞서야 한다는 정당화다. 그러나 아무리 상대의 야만을 비추는 거울이라 해도, 괴물의 언어를 그대로 모사하는 순간 미러링의 논리는 정당성을 잃고 타락으로 전락한다. 이런 행태는 자신들이 그토록 격렬하게 비판해왔던 극단적 보수 권력의 칼날과 과연 무엇이 다른 것인가.
진정한 개혁의 전략은 극단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개혁 진영은 오히려 극우의 거친 언어와 증오의 문법을 닮아가며, 스스로를 온건한 다수로부터 고립시키는 길을 걷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당장 지지층의 분노를 자극해 선거에서 손쉬운 승리를 거두려 했을지 모르나, 실상은 그 대가로 한국 정치의 미래를 짊어질 유권자들을 완강하게 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개혁 진영이 마주한 인구구조의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냉혹하며, 감정의 분출에 취해 있을 시간이 없음을 경고한다. 흔히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시간이 흐르면 고령층 보수 유권자가 자연 감소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구도가 도래할 것이라 착각하지만, 이는 데이터의 이면을 보지 못한 철저한 오판이다. 현재 보수 성향을 띠거나 기성 정치체제에 심각한 환멸을 느낀 20~30대 청년 세대가 새롭게 선거권을 얻어 유입되는 숫자가, 70대 이상 고령 보수 유권자의 자연 감소분보다 적어도 향후 10년간은 훨씬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본질적으로, 선거 전략을 떠나서 진정한 개혁을 원한다면 청년들의 목소리를 ‘철없음’으로 치부하며 밀어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요구가 거칠고 미성숙할지라도, 끝까지 귀를 기울이고 품어 안는 지난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못 한다면, 미래를 향한 민주 진보 진영의 정치적 승리 같은 것은 없다. 극우를 고립시켜야 할 진보 진영이 도리어 청년들을 밀어내며 스스로 고립의 성을 쌓아서는 개혁의 성공은 단연코 불가능하다.
지난할지라도 언어의 품격을 회복하고 상식의 건강성을 지켜나가는 과정만이 ‘실제적인 개혁’을 가능하게 한다. 거친 독단의 언어는 승리의 착시를 줄 뿐, 다수의 공포심을 자극하고 정작 개혁의 대상을 결집해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전진시키지는 못한다. 타자를 악마화하여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잔혹한 공생의 사슬을 이제는 끊어내야 한다. 끈질긴 설득의 미학과 포용의 노력이야말로 정치가 야만을 끝내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열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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