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파가 아닌 독립파 [이진순 칼럼]
하룻밤 사이 기류가 180도 달라져 있었다. 주말(6월7일)에 올림픽공원을 다녀온 친구 말로는 손으로 그린 태극기와 팻말을 든 시민들이 ‘재선거’를 복창하고 있다고 했는데, 하루 지나 내가 갔을 땐 구호가 ‘부정선거 재선거’로 바뀌어 있었다. ‘투표권을 지켜주세요’ ‘국민의 주권을 위하여, 재선거!’라고 알록달록 써 붙인 벽보들 위로 ‘부정선거 척결하라’ ‘윤석열이 옳았다’ 같은 구호들이 처덕처덕 잇대어져 있었다. ‘이곳에선 24시간 재선거를 외칩니다’라는 참가자 수칙을 담은 대자보도 눈길을 끌었다. 대자보 속 ‘재선거’란 글자 옆에 문장 삽입표(∨)와 함께 ‘부정선거’란 단어가 덧붙여져 있었다. 바닥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이들은 태극기와 함께 ‘부정선거 재선거’ 구호를 팻말 위에 그려 넣고 있었다. 섬뜩했다. 할머니 옷을 입고 할머니 침대에 누워 빨간 모자를 기다리던 늑대의 낯선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기민하고 영악한 날치기에 당한 느낌이었다. 잠실 집회장의 본체가 바뀌는 동안 빛의 광장을 주도했던 시민단체들의 적극적 개입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내 또래 지인 가운데는 이 사태에 분노하는 청년들을 마뜩잖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행정적인 실수를 가지고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냐?” “계엄 때는 뭐 하다가 이제 와서…”라든가, “걔네는 왜 말끝마다 개인, 개인, 하냐? 개인주의가 자랑이냐?”고 힐난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는 사이, “국민참정권 훼손에 대해, 기성세대는 왜 우리만큼 분노하지 않는가?”란 불만이 청년들 사이에서 쏟아져 나왔다. 재선거를 주장하는 젊은이들을 정치적으로 미성숙한 존재, 극우파에 이용당하기 쉬운 존재로 치부하는 건 기성세대의 오독이고 오만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스스로 “주권 감수성 부족을 반성”한다며 강도 높은 조사와 개혁을 약속한 것이나, 김민석 국무총리가 대학생 간담회 이후 이 사안을 ‘국민참정권 침해 사태’로 규정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선거관리위원회 사태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한 젊은이들은 ‘개인 단위 자발적 참여’임을 강조하며 정치적 거리 두기를 선언한다. 특정 정당 편들기가 아니라 국민참정권의 문제라는 것이다. 실제로 2030은 ‘지지 정당 없음’의 비율이 가장 높은 세대다. 우리는 지금까지 지지 정당이 없다고 한 이들을 ‘무당층’이라 불러왔다. 나는 이번 사태를 보며 그간 관습적으로 불러온 ‘무당층’ ‘부동층’ 혹은 ‘중도층’이란 용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미국 진보의 상징인 버니 샌더스는 스스로를 ‘독립파’(independent)라고 부른다. 상원의원으로 수십년을 일하고 민주당 대선 경선에 나서면서도 당적 없이 ‘인디 정치인’으로 독자적 입지를 구축해왔다. “나는 독립파인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난 민주당원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롭게 발언하고 (사안에 따라) 민주당, 공화당에 반대투표를 할 수 있다.”(1991 에이피(AP) 통신 인터뷰) 버니 샌더스를 가리켜 아무도 무당파나 중도라 하지 않는다. 그는 양당 모두 저소득층, 노동자, 서민의 이해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샌더스는 ‘양당 사이’에 있는 게 아니고 ‘양당과 다른 궤도’에 있다. 인디(독립)영화, 인디음악이란 장르처럼, 이제 우리도 독립파(인디정치)란 용어로 새로운 주권자의 등장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 지지 정당이 없다고 답한다면, 기성 정당이 자신의 이해를 대변해주지 못한다는 불만의 표시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정당이 바뀌어야지, 유권자에게 양자택일의 밸런스 게임을 강요해선 안 된다. 그간 우리는 거대 양당을 우주의 중심에 두고 그 원근 거리에 따라 개인의 정치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방식에 길들어 왔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과 같다. 중도, 온건, 부동층이란 말은 모두 천동설의 언어다. 그래서 선거 때만 되면 양당과 등거리에 선 가상의 유권자를 가정하고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어정쩡한 포석을 하는 걸 확장 전략이라 여긴다. 패착이다. 우주의 중심은 정당이 아니라 시민이다. 지지 정당이 어디로 이동하든 그 궤도를 충실히 따라 도는 유권자보다, 궤도 밖에서 사안에 따라 독립적인 선택을 하는 유권자에게 주목하는 정당이라야 미래가 있다. 강성 지지층의 결집에만 의존해서 자기 궤도 안에 갇히면 새로운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다. 독립파의 요구를 이해하고 반영하며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꾸는 것, 그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응답하는 정당이라야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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