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시민 육성을 위한 ‘큰경험’의 절박함 [세상읽기]
십수년 전 ‘김대중 자서전’을 읽었다. 큰 정치인 한 사람의 몸속으로 한국 현대정치사가 관통해 나가는 과정이 1300여 쪽에 이르는 분량에 담겨 있었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도 떠오른다. 정치 지도자가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반대파들에게서 숱하게 설움받았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비슷한 처지였다. ‘학습 능력’(學力)이 아니라 ‘배움 이력’(學歷)을 공격 대상으로 삼던 정적들은 치졸하고 저렴한 의식을 가진 모사꾼이다. 나는 교육제도를 통해 잘 갖춰진 교육의 힘을 믿고 싶다. 바르게 정비된 학교제도 아래 자격증을 갖춘 교사, 엄선된 교육과정은 누가 뭐래도 좋은 교육의 필수요건이다. 그럼에도 뭔가 부족하다. 배움의 핵심은 ‘학습하려는 의지’에 놓여 있다. 그런 면에서 김대중, 노무현, 이재명은 학습 의지와 학습 능력을 동시에 갖춘 평생학습자로 여겨진다. 세 사람 앞에 펼쳐졌던 인생 역정은 그들의 진지한 ‘탐구생활’과 뗄 수 없다. 감옥과 서재, 망명지, 의원회관, 파업 현장, 법정, 시장, 공직, 시민운동의 한가운데서 이들은 읽고, 토론하고, 비판하고, 글쓰기를 지속했다. 김대중은 감옥을 두고 ‘작지만 큰 대학’이라 표현했다. 세 정치가의 삶에서 발견되는 첫번째 특징은 강력한 실존적 동기를 자신의 정치 지향과 결부시켰다는 점이다. 김대중은 목포에서 청년 실업가로서 해운사업을 하다가, 노무현은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일하면서, 이재명은 성남에서 최하층 노동자 가정의 삶을 헤쳐 나가면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 속으로 깊숙이 들어섰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몸으로 시대와 부딪히면서 그 같은 경험을 숱하게 겪는다. 다만 그토록 귀한 실존적 동기를 학습과 행동으로 잘 결합하지 못할 뿐이다. 누구든지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순간, 능력 부족을 깨닫는다. 특히 정치 현실은 각기 다른 계급 간의 욕망과 기대, 대립과 긴장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공간이며, 그것을 개인의 힘으로 제어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두번째 특징인 학습 동기는 정치가로서 자기 이상을 현실 가운데 구현하기 위한 방책 모색 과정에서 형성된다. 학자나 전문가는 현실을 분석하고, 이상적 방향을 제시하는 데 뛰어나다. 다만 거기까지다. 정치인은 대중이 품고 있는 공적인 이상을 피부로 느끼게 구현해야 한다. 문제는 그 지점에서 참고할 만한 실행계획서, 수행 능력 높은 진짜 전문가들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정치인이 직접 학습하고 설계, 시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대중과 노무현, 이재명은 학습하는 정치인이었다. 세 사람은 우리 현대사가 안고 있는 모순과 아픔을 가슴에 끌어 담아 실존적으로 자각했고,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했으며, 구체적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 학습으로 뒷받침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이상을 실천할 수 없었다. 노무현은 유서에서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고 절규했다. 정치가로서의 이상 실현을 위한 학습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절박함을 토로한 것이다. 이들은 무엇 때문에 실존적 자각과 마주치게 되었을까? 청년 시절부터 정의감, 윤리적 감각, 역사의식이 그들의 가슴에 내재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학교는 지식과 기술을 전하는 노릇에만 치중하면서 동기와 의식을 형성하는 일에는 거의 손을 놓고 있다. 순서가 거꾸로 된 것이다.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의 오렌세 지역에는 어린이 청소년 공동체 ‘벤포스타’(Benposta)가 있었다. 이 학교 아이들은 졸업하기 전 1년간 ‘큰 경험’(Big Experience)이라는 과제를 달성해야 한다. 도시에 나가 구걸을 하기도 하며, 어떤 아이는 작은 노점상을 운영하기도 한다. 1년을 보낸 뒤 졸업 예정자는 벤포스타 공동체로 돌아와 후배들 앞에서 자기 체험을 토대로 발표하고, 질의응답을 받는다. 아이들은 체계적 교육과정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학습 계획을 쫓아 여행, 인터뷰, 프로젝트 등을 기획해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혀 세상을 배워나간다. 모든 아이가 김대중, 노무현처럼 탁월한 정치가로 성장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음 세대가 현실 가운데서 정의감과 역사의식을 키우고, 당면 문제를 직접 해결함으로써 학습 경험을 쌓아간다면 어떨까? 아이들은 관심 분야에 따라 대부분 일생 동안 학습을 즐길 것이다. 탁월한 시민을 그렇게 키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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