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코파이를 주는 소년 [크리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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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의 일이다. 해 질 때까지 놀다 들어온 아이들 손에 초코파이가 들려 있었다. 무슨 돈으로 샀느냐고 물어보니, 놀이터에서 어떤 형이 줬다는 것이다. 어떤 형인데? 나이가 좀 많은 형인데 전에도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다가와서는, 초코파이를 주면서 친하게 지내자고 했고 그래서 오늘 그 형과 놀았다는 것이다. 아이 키우는 부모에게 이런 얘기가 얼마나 오싹한 것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걔가 몇 살쯤이니? 어떻게 생겼니? 정확하게 뭐 하고 놀았니? 다행히 위험한 일은 없었다. 다섯 살쯤 많은 그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학교를 안 다녀서 친구가 별로 없어. 나는 너희들처럼 어린 애들하고 노는 게 더 좋아. 초코파이를 줄 테니 나랑 친구 하자. 우리 애들은 좋다고 했고 그래서 셋이서 미끄럼틀과 정글짐 등을 타고 놀았다. 몸이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다고 했다. 나는 그 아이가 어떤 연유로 학교를 안 다니는지 추측해 봤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결국은 나도 그 아이를 보고 말았다. 얼핏 중학생쯤 돼 보이는 소년이 낮 시간 아무도 없는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 혼자 앉아 있었다. 오늘도 초코파이를 받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나는 얼굴도 모르면서 그 아이가 틀림없다고 넘겨짚은 건지도 모른다. 며칠 전 이 아이가 혼자 앉아 있는 이미지가 십수년 만에 떠올랐는데 곧 온몸이 뻐근해질 정도로 마음이 아파졌다. 왜 기억났는지는 모르겠다. 갈수록 접점을 잃어 가는 우리 자식들과의 관계 때문일까? 또는, 한때 젊은 세대로의 편입을 열망했다가 이제는 더 신경질적이 된 듯한 중년 세대의 담론을 읽은 탓일까? 나이 먹은 사람이 외모나 말투 같은 것을 가장함으로써 젊은이들 틈에 끼려 하는 것은 보상받기 어려운 노력이라고 나는 작년에 쓴 적이 있다. 세대의 스타일이나 은어 등이 검색으로 모두 접근 가능한 이상, 검색으로 해결 안 되는 것, 생물학적 나이는 점점 높은 가치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토마스 만의 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 나오는, 짙은 화장을 한 채 젊은이들과 놀려고 애쓰는 노인의 의미는 뭘까. 모든 사람 눈에 명백한 것을 노인도 느끼고 있을까. 놀이터에서 초코파이를 베푸는 소년 역시 몇 살 어린 애들을 상대로 가망 없어 보이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은 같다. 그렇지만 여기서 노인과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흥미로운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친구가 없어. 나랑 친구 하자.” 현실 세계에서 누구도 이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노인의 전략은 가면을 쓰는 것이지 무방비로 진실을 말하는 게 아니다. 소년의 말은 우리에게 묻는 듯하다. 언어의 진정성에는 힘이 있을까? 의도와 내용은 이처럼 일치할수록 좋을까? 그러나 그 언어는 우리 마음을 아프게는 하지만 작동하지는 않는다. 선뜻 소년의 요청을 수락했던 우리 아이들도 얼마 뒤에는 알게 됐을 것이다. 이런 말에는 다들 도망칠 수밖에 없다는 것. 우정을 얻는 데에도,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아마 우정에는 무심한 듯한 제스처가 요구되는 것 같다는 것. 이런 지식은 그 소년의 범위 바깥에 있었다. 소년은 초코파이라는 전략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유효 기간이 단 하루일지언정 스스로 학습한 성공 공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떨까. 관계가 부스러진다고 느낄 때 옛 성공 전략에 더 매달리는 것 아닐까. 사실 소년과 별 차이도 없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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