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표소 시위, 지도부 없이 ‘무기한 봉쇄’…부정선거론 해방구 돼
17일 오전 ‘개표소 봉쇄 시위’가 한창인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 이곳을 찾은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도망치듯 현장을 빠져나갔다. 천준호·전용기·임오경 의원은 이날 오전 대한체육회와 핸드볼경기장 입주 체육 종목 단체 관계자들과 면담한 뒤, 전날 체육 단체들이 진입을 시도했던 경기장 ‘2-1’ 출입문 근처에 접근했다. 하지만 시위 참가자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어 의원들을 둘러싸더니 성난 목소리로 “빨갱이는 북한으로 꺼져라”라고 소리를 질렀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13일째 이어지는 개표소 봉쇄 시위가 사실상 무기한 대치 상태에 빠져든 모양새다. 정치적 시위와 무관한 체육단체들은 이날도 경기장 내 사무공간 진입이 무산되면서 행정 공백과 경기 운용 차질 등 애먼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시위 주최자나 지도부가 없어 출입 문제를 협상할 주체가 부재한 상황이다 보니, 사태 해결을 위한 ‘출구’가 보이지 않는 국면이 장기화할 조짐이다. 대한체육회 산하 단체들은 봉쇄 시위로 국제대회 출전 준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오는 22일 인천에서 열리는 세계핀수영선수권대회를 치러야 하는 대한수중핀수영협회 쪽은 이날까지 경기에 필요한 물품들을 갖고 나오지 못했다. 전날 펜싱 국가대표팀은 시위 여파로 개인 장비를 챙기지 못한 채, 다른 곳에서 장비를 빌려 아시아선수권대회 출전을 위해 출국했다. 유승민 대한체육회장은 이날 방송사 라디오 인터뷰에서 “우리도 애국심이 있고 투표권이 있는 일반 국민”이라며 “생존이 걸려 있는 체육 단체들의 목소리를 조금만 들어주셔서 최소한의 행정 업무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주최자가 없는 시위 특성상 경찰과 체육 단체들은 협상 상대를 찾는 것부터 난항을 겪고 있다. 실제 전날 국민의힘 의원들이 시위 참가자 일부와 협상한 끝에 체육 단체 직원들의 출입을 허용하기로 했지만, ‘성조기 치마’를 두른 한 참가자가 몸으로 이를 막아서면서 끝내 무산됐다. 한 체육 단체 관계자는 “시위 참가자 사이에 집행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극우 성향이 강한 중장년층 및 유튜버들과 젊은층 간의 입장이 계속해서 부딪히는 등 혼란 상태”라며 “애써 하나를 협의해도 다른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네가 뭔데 그렇게 하느냐’고 말하면 모든 것이 뒤집히는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 애초에 ‘투표함 검증’을 내걸었던 시위 참가자들의 구호 역시 ‘재선거’를 넘어 ‘부정선거 규명’, ‘한미 공조수사’ 등으로 변질됐다. 그 결과 올림픽경기장 일대는 ‘부정선거론’의 구심점이 되는 상징적 공간이 되고 있다. 빨간 모자를 쓴 한 30대 여성은 이날 서울지하철 올림픽공원역에서 핸드볼경기장으로 향하는 길목을 장시간 지키고 서서 60∼70대 참가자들과 ‘부정선거론’을 놓고 열띤 대화를 했다. 그가 “선관위 전산 장치에 카지노 기계에 쓰이는 칩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조작이나 해킹이 100% 가능하다는 것이 부정선거가 이뤄졌다는 증거”라고 말하자 주변에서 호응이 터져 나왔다. 이날 집회에서는 “부정선거를 덮고 가려는 자들은 모두 적”이라는 극우 유튜버 전한길씨가 연설을 하던 도중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전씨의 연설에 환호하던 무리가 이의를 제기하는 한 중년 남성을 강제로 끌어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참정권이 침해된 것에 분노는 하지만, 개표소 봉쇄 현장의 현실과 괴리된 주장에 부담감을 느낀 이들이 늘어나면서 시위 참가자들 사이 입장도 분화되는 양상이다. 참정권 침해를 비판하는 이들 330명이 모인 온라인 대화방에는 “선거 관리 부실 비판에 집중해야지, 선거가 조작됐다는 ‘음모론’과는 선을 그어야 한다”는 의견과 “부정선거가 실재했을 가능성을 어떻게 배제할 수 있냐”는 반론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다. 이날 올림픽공원에 처음 나왔다는 이아무개(72)씨는 “아무리 그래도 펜싱 선수들이 필요로하는 물자는 내보내야 한다, 아시안게임을 한다는데 그것까지 못 내보내게 하는 건 정말 잘못됐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치권이 교착상태를 풀 방책을 보다 적극적으로 모색하되, 시위 참가자들의 도를 넘는 행위에 대해서는 공권력의 단호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설동훈 전북대 교수(사회학)는 “국회가 제대로 움직여서 양당 합의가 나오면 가장 좋을 상황”이라며 “진상조사·재발방지 대책 등을 국회 주도로 마련하고, 시위대가 이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상진 서강대 교수(사회학)는 “(업무방해·폭력 등)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고 볼 여지가 있는 이들과 협상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일 수 있다”며 “공권력을 행사하는 경찰 현장 지휘관에게 불법적인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재량권을 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정인선 기자 [email protected] 정봉비 기자 [email protected] 조해영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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