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도 맑고 달도 맑고…그대로 시가 되는 풍경이로세
50년을 넘게 살고, 인생의 절반 이상을 길 위에서 보내며 내가 겨우 움켜쥔 유일한 사실은 삶이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세워둔 계획은 번번이 빗나가고, 단호했던 결심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희미해진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아주 먼 미래를 계획하고 설계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 누릴 수 있는 고요와 즐거움이 있다면 오늘 누리려고 하고, 마음이 동하는 곳이 생기면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훌쩍 떠난다. 불행이란 놈은 언제나 내가 모르는 길모퉁이에 숨어 있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치곤 하니까 최선을 다해 이 순간의 행복을 움켜쥐려고 한다.
지금 나는 경남 밀양 월연대 마루에 앉아 창밖으로 흘러가는 밀양강을 바라보고 있다. 얼마 전 새벽,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달력을 보다가 숨이 막혔다. 최근 한달 동안 내 일상은 온통 출판사 신간 배본과 에세이 마감, 대본 시놉시스 수정 작업으로 빽빽하게 얽혀 있었다. 매일 밤늦게까지 맥북을 두드리고, 단백질 바와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러다 문득 욕실 거울 속 초췌한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어디라도 가. 가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와.’ 거울 속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편집했던 어느 여행 에세이 속, ‘달을 맞이하는 정자’에 관한 글을 떠올렸다. 그렇게 달려간 밀양.
월연대는 밀양강과 단장천이 합류하는 기암절벽 위에 있는 정자다. 조선 중종 때 한림학사를 지낸 월연 이태가 기묘사화의 소용돌이를 피해 내려와 지은 별서라고 한다. 그는 이곳에 월연대와 쌍경당을 세우고 은거하며 자신을 ‘월연주인’(月淵主人)이라 불렀다. ‘달이 머무는 소용돌이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세상은 그를 가리켜 ‘몸과 명예에 흠집 하나 남기지 않고 온전히 삶을 지켜낸 사람’이라는 뜻으로 ‘기묘완인’(己卯完人)이라 불렀다. 월연주인, 기묘완인…, 참 근사한 이름이다. 나이 쉰을 넘긴 지금의 내가 그때 태어났다면, 나는 나를 무엇이라 부르며 이 무잡한 세월을 건너갔을까.
주차장에 차를 대고 월연대로 향하는 오솔길에 들어서자마자 ‘아, 오길 잘했다’는 마음이 든다. 두 사람이 간신히 어깨를 비끼며 걸을 만한 좁은 길이다. 오른쪽 나뭇가지 틈새로 부서지는 여름의 잔광이 밀양강 위에 옥색 윤슬을 촘촘히 박아 넣고 있다.
나무 그림자가 깊어지는 골목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면 거대한 석축 위로 처마를 사뿐히 들어 올린 쌍경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협문 하나를 지나 계곡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몇발짝 걸으니 쌍청교(雙淸橋)가 보인다. 이끼 낀 돌다리다. ‘강물도 맑고 하늘에 뜬 달도 맑아 맑은 것이 대칭을 이룬다’는 뜻이다. 다리 아래 흐르는 실개천 이름은 영월간(迎月澗). ‘달을 마중 나가는 실개천’이라는 뜻이다. 다리를 건너면 월연대다. 쌍경당의 쌍경(雙鏡)은 ‘강물과 달이 함께 거울처럼 밝다’는 뜻. 그러고 보니 이름들이 온통 달을 향해 있다. 옛사람들은 달을 참 좋아했나 보다. 달에 이름을 이렇게 많이 붙인 걸 보면.
조선의 사대부들이 지은 정자는 대개 홀로 외롭게 서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 월연대 일원은 담양의 소쇄원처럼 여러 건물이 담장과 계곡을 조형적으로 나누어 쓰며 하나의 은밀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모든 모퉁이와 돌다리마다 시적인 이름을 이름표처럼 붙여놓은 옛사람들의 지독한 탐미주의란.
월연대 툇마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찬란한 여름빛을 품고 유유히 흘러가는 밀양강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러다 문득 이곳에 짙은 어둠이 내리고 보름달이 차오르는 밤의 풍경이 궁금해졌다. 보름날 밤, 달빛이 이 깊은 강물 위에 수직으로 길게 내리비치는 모습이 마치 거대한 빛의 기둥 같다 하여 옛사람들은 이를 ‘월주경’이라 일렀단다. 월연주인은 그 빛의 기둥이 강물에 똑바로 서는 보름마다 전국의 풍류객들을 불러 모아 밤새 시를 짓고 술잔을 나눴다. 달빛을 지팡이 삼아 강물을 굽어보며 밤을 지새우던 옛 문인들의 그 사치스러운 기쁨을, 도시의 컴플레인과 세금계산서에 시달리는 내가 반만큼이나 헤아릴 수 있을까.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왔던 숲길을 천천히 되짚어 나온다. 달과 물이 투명하게 비치는 다리, 달을 맞이하러 나가는 시냇물, 비 그친 뒤의 깨끗한 추녀, 그리고 강물 한가운데 우뚝 서는 달빛의 기둥 같은 낱말들을 입안에서 사탕처럼 천천히 굴려본다. 나는 굳이 새로운 시를 쓰려고 애쓸 필요가 없겠다. 세상에 숨겨진 시 같은 풍경들이나 찾아다니며, 그 속에 박힌 아름다운 시구들을 읽어 내리고, 어울리는 음악을 곁들이며 살아도 내 삶은 충분히 안락하고 보람차겠다.
월연대를 빠져나와 위양지로 차를 몰았다. 신라시대에 농사를 위해 축조되었다는 오래된 저수지다. 연못가에는 수백년 세월을 버텨온 왕버들 나무들이 물을 마시려는 듯 낮게 몸을 구부리고 가지를 드리운 채 자란다. 이른 아침이면 수면 위로 하얀 물안개가 몽환적으로 피어오르는데, 그 찰나의 장면을 붙잡기 위해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카메라를 메고 새벽부터 진을 치기도 한다.
연못 한가운데에는 다섯개의 작은 인공 섬이 떠 있고, 그중 하나에 ‘완재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다정하게 앉아 있다. 정자를 가만히 감상할 수 있도록 연못 주위로 나무 벤치들이 놓여 있는데, 거기 앉아 바라보는 풍경이 너무 정밀하여 잠시 숨을 죽이게 된다. 연못을 따라 둥글게 이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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