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중동 퇴각 선언과 그 이후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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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이란과 맺을 것이라는 14개항의 양해각서(MOU)는, 종이 위 문구만 놓고 보면 ‘종전 합의’라기보다 ‘패권 질서의 퇴각 선언’에 가깝다. 지난 2월 말, 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이란의 정권 교체와 중동 질서의 혁신적 재편을 노렸던 도널드 트럼프의 대전략은, 이 문서 한장 앞에서 사실상 스스로 무효화됐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누가 무엇을 양보했는가’의 비대칭이다. 이란이 내놓은 것은 지난 20년간 줄곧 반복해온 “핵무기를 만들지 않겠다”는 약속의 재확인, 60일간의 추가 협상 수용, 그리고 미국이 선결 조건을 맞춰줄 경우 30일 이내 이란 주도로 호르무즈해협을 다시 열어주겠다는 정도다. 다시 말해, 이미 국제사회에 공언해온 원칙의 재확인과 해협 개방에 대한 상징적 양보가 전부다. 그 대가로 미국이 내놓은 리스트는 거의 항복문서에 가까울 정도다. 미국은 레바논을 포함한 모든 전선에서의 즉각·영구 종전을 약속해야 한다. 이 말은 사실상 이스라엘에도 무기를 내려놓도록 설득한다는 뜻이다. 이란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고, 이란의 주권을 존중하겠다는 조항은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40여년간 미국이 구축해온 ‘불량국가’ 프레임을 스스로 걷어내는 상징적 선언이다. 여기에 30일 내 해상 봉쇄 전면 해제, 이란 주변에서의 미군 단계적 철수, 이란산 원유·석유화학에 대한 제재 중단과 금융망 접근 허용, 동결자산 240억달러 해제(그 절반을 협상 시작 전에 선지급), 그리고 동맹국과 함께 최소 3천억달러 재건 계획을 제시하겠다는 약속이 줄줄이 달려 있다. 협상 기간에는 미국의 병력 증강도, 신규 제재도 금지한다. 호르무즈해협의 통제권 문제는 애써 논외로 돌린다. 사실상 이란이 이미 가진 지리적·군사적 레버리지를 기정사실로 인정한다는 의미다. 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해선 어떠한 제한도 명시하지 않는다. 이란이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 장거리 무인기 역량을 계속 키워도, 적어도 이 문서가 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레바논 헤즈볼라와 예멘 후티, 이라크·시리아의 친이란 시아파 민병대 등 ‘저항축’에 대한 지원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수십년 동안 ‘이란 팽창주의’의 핵심 수단에 대한 방치다. 이런 구도를 차분히 다시 읽어보면, 이 합의가 미국의 승리 선언문처럼 보이긴 어렵다. 오히려 전쟁 이전의 출발점과 비교하면 이란의 상징적 승리가 얼마나 큰지 선명해진다. 지정학적으로 이란의 위상은 한 단계가 아니라 두세 단계는 더 올라간다. 호르무즈를 지렛대로 한 ‘해협의 문지기’라는 위치는 더욱 공고해지고, 미군이 단계적으로 빠져나가는 자리를 이란과 그 우군 세력이 채우게 된다. 정치적으로도 신정 체제는 외부의 군사·경제 압박을 견뎌낸 뒤, 미국으로부터 사실상의 체제 인정과 주권 존중을 문서로 받아낸 셈이다. 경제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다. 원유·석유화학 수출 재개, 금융 제재 완화, 동결자산 해제, 3천억달러 규모 재건 패키지 약속까지, 전쟁으로 무너진 이란 경제를 한번에 되살릴 정도의 ‘마시멜로’가 한꺼번에 쏟아진다. 전쟁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대외 개방의 경로가 열리고, 중국·러시아·유럽·걸프 자본이 이란으로 들어갈 통로도 훨씬 넓어진다. 물론 이런 장밋빛 전망이 양해각서 그대로 실현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이런 전망만으로도 이란은 중동의 경제·외교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한층 강화한다. 미군의 중동 철수는 군사 배치를 넘어 패권 구조의 후퇴를 의미한다. 미국이 손을 떼는 순간, 중동은 더 이상 ‘미국의 바다’가 아니라, 중국·러시아 등 다극화된 세력들이 경합하는 또 하나의 각축장이 된다. 이제 남는 질문은 하나다. 이 협상 이후 미국의 전략적 행보다. 하나의 시나리오는, 트럼프가 줄곧 말해온 대로 “끝없는 전쟁”을 정리하고 인도·태평양에서 중국 견제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경우 남중국해와 대만해협, 동중국해에서의 군사적 긴장이 상시화하는 대신, 미국의 동맹 억지력은 단기적으로 강화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시나리오도 있다. 미국이 중국과의 정면 대결마저 회피하고, 군사력과 재정을 더 이상 외부에 분산시키지 않겠다는 선택을 할 경우다. 이때 미국은 인도·태평양에서도 ‘역외 균형자’ 정도에 머물며, 서반구 이익 방어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그 전략적 결정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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