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킬 스위치’, 구독 취소 [코즈모폴리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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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인 2022년, 러시아군은 우크라 남부의 물류 요충지인 멜리토폴을 점령하고 우크라 최대 농기계 공급 업체 ‘아그로텍 인베스트’ 대리점을 습격했다. 노린 건 최첨단 미국산 농기계였다. 인공지능(AI) 카메라 센서와 초정밀 지피에스(GPS)를 갖추고 완전자율주행으로 밭을 가는 트랙터, 바퀴가 흙을 감지해 씨앗마다 적합한 깊이로 심어주는 파종기, 수확과 동시에 곡물의 단백질 함량과 수분율을 측정하고 탈곡 속도도 자동 조절하는 콤바인 등 27대의 값이 도합 500만달러(약 76억원). 러시아군은 1100㎞ 떨어진 체첸공화국까지 이 ‘전리품’을 실어 날랐지만, 미국 본사가 원격으로 ‘꺼버린’ 뒤엔 고철 더미가 되고 말았다. 원격 비활성화 장치, 일명 ‘킬 스위치’의 무서움을 보여준 사건이다. 만약 전투기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떨까. 국방·안보 분야에선 킬 스위치는 외국 기술에 의존할 때 생기는 위협 요소다. 지난해 유럽에서는 ‘미국 전투기에 킬 스위치가 숨겨져 있다’는 의혹이 확산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끊겠다고 압박하던 와중, 우크라에 제공된 에프(F)-16 전투기가 업데이트 지원 차질로 운용이 중단되는 일이 발생하면서다. 제조사는 “킬 스위치는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꼭 킬 스위치가 아니라도, 동맹국들은 전투기 구매 뒤에도 클라우드 기반, 위성항법시스템, 소프트웨어 면에서 공급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킬 스위치가 꼭 전장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체포영장을 발부했다는 이유로 미국의 제재 대상이 되어 미국 기술 기업 서비스 이용이 차단된 유럽 거주 국제형사재판소(ICC) 재판관들의 일상은 완전히 엉망이 됐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아침 출근길 커피를 사려 하자 애플페이가 먹통이다. 신용카드는 ‘비자’와 ‘마스터’ 연동 탓에 사용이 안 된다. 프랑스 출신 니콜라 기유 재판관은 “프랑스 금융·디지털 서비스 대부분이 미국 것이어서 자동입출금기 일부도 결제망 문제로 현금 인출이 안 된다”고 했다. 구글 이메일 계정은 폐쇄됐고, 업무용 도구인 슬랙, 메신저 와츠앱, 화상회의 앱인 팀스·줌도 실행이 안 된다. 판결문을 작성하던 구글독스는 접속할 수 없고, 자문을 구하던 챗지피티(GPT) 구독은 취소됐다. 넷플릭스, 애플티브이, 아마존 프라임, 유튜브를 켜자 ‘차단 계정’ 메시지가 뜬다. 슬로베니아 출신 베티 호흘레르 재판관의 경우, 한 지인이 아마존을 통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냈다가 그 지인의 아마존 계정까지 정지당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미국이 이른바 ‘킬 스위치’를 사용해 국경 너머 유럽 사용자들의 일상을 얼마나 빠르게 마비시킬 수 있는지 보여준다”고 짚었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앤트로픽의 최신 인공지능 모델 ‘클로드 페이블5’에 대해 미국 시민권자가 아닌 모든 이의 접근을 즉시 차단하도록 명령했다. 이 사태는 최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의제로까지 번졌으며, 유럽이 핵심 기술에서 미국 의존도를 줄이고 기술 주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헨나 비르쿠넨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기술 주권 담당 수석 부집행위원장은 “인공지능 같은 핵심 기술에 있어 특정 기업이나 제3국에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핵심 기술을 지닌 나라의 눈치를 보며 ‘구독 취소’만 걱정할 순 없단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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