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로켓왕’ 첸쉐썬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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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켓왕’ 첸쉐썬(錢學森, 1911~2009)의 이름을 아는 사람도, 낯설게 느끼는 사람도 있으리라. 어쨌든 그는 단연 현대 중국의 가장 유명한 과학자다. 유명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첸쉐썬은 중국 과학기술 그 자체를 표상하는 하나의 상징에 가깝다. 이력만 보면 그럴 만도 하다. 그는 상하이교통대학을 거쳐 1935년 미국으로 건너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석사를, 캘리포니아공과대학(칼텍)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이후 (훗날 나사로 편입되는) 칼텍 제트추진연구소(JPL)를 공동 창립했고, 미군의 미사일 개발과 국방 연구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전후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공산당 스파이로 몰려 모든 업적을 부정당한 채 추방됐고, 1955년 사회주의 중국으로 귀국했다. 첸쉐썬은 이후 마오쩌둥 사상에 충성하며 혹은 순응하며 ‘양탄일성’(兩彈一星), 곧 핵무기, 탄도미사일, 인공위성 개발 사업의 중추가 되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박해받지 않았다. 중국 최초의 인공위성 둥팡훙 1호 발사 50돌을 맞아 2020년 4월 인민일보가 실은 기념 기사에서 ‘중국 항공우주공학의 아버지’이자 ‘로켓왕’ 첸쉐썬은 마오쩌둥·덩샤오핑·시진핑에 이어 네번째로 거명되었다. 최고지도자 셋 다음 자리에 한 사람의 과학자가 선 것이다. 이 찬란한 명성 뒤에는 묘하게 빈구석이 있다. 중국 안팎에서 통용되는 첸쉐썬에 관한 기억과 서사는 정작 그가 중국의 미사일과 위성 개발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기여했는지가 우선이 아니다. 이보다는 미국에서의 성공과 수난, 즉 ‘굴욕당한 천재’라는 페르소나를 훨씬 더 중시한다. 대표적인 첸쉐썬 전기인 아이리스 장의 ‘중국 로켓의 아버지 첸쉐썬’은 전체 25개 장 중 23개를 미국 시절에 할애하고, 귀국 이후의 생애는 단 2개 장에서 다룰 뿐이다. 그가 중국의 각종 무기와 항공우주공학 프로젝트에서 실질적으로 어떤 구실을 했는지에 대해 과학사적으로 알려진 바는 의외로 적다. 의문스럽게도 1964년 핵탄두를 실을 수 있는 중거리 미사일 ‘둥펑 2호’가 발사될 때도, 1970년 첫 인공위성 ‘둥팡훙 1호’가 궤도에 안착할 때도, 인민일보·광명일보 같은 중국의 대표 관영 매체에 첸쉐썬의 이름은 단 한번도 안 나온다. 사실 첸쉐썬은 44살의 나이로 모국으로 돌아온 1955년부터 73살에 이르는 1984년까지 그다지 큰 사회적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를 둘러싼 일종의 우상화 작업은 그의 노년기와 사후인 1985~1992년과 2009~2012년에 집중되었다. 우선 첫번째 시기를 살펴보자. 그는 70대 후반인 1987년에야 비로소 중국과학기술협회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1988년부터 인민일보에 그를 다룬 기사가 폭증하기 시작했으며, 1991년에 ‘국가 걸출 공헌 과학자’ 칭호를 받았다. 왜 하필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였을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는 1989년 천안문 사건과 관련이 있다. 중국공산당은 민주화 운동으로 정치적 정당성이 흔들리던 순간, 과학기술 발전이 정치 개혁보다 중요하다며 첸쉐썬을 권위의 원천으로 전면에 내세웠다. 이는 큰 정치·사회적 위기가 발생할 때, 중국에서 과학자의 영웅적 이미지는 꽤 요긴한 돌파구로 이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다음으로 2009~2012년 기간이다. 2009년 첸쉐썬이 사망하자 성대한 국가 추도식이 열렸다. 탄생 100돌인 2011년에는 모교 상하이교통대학에 그를 기리는 호화로운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첸쉐썬의 명성이 완성된 게 비교적 최근인 2010년대였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중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경제 성장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냈음에도 노벨상 수상이라는 과학적 업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집단적 열등감과 초조함에 시달리던 나라였다. 외국의 중국계 과학자들을 제외하면, 중국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배출한 노벨상 수상자가 아직 없던 시절이었다. 첸쉐썬이 세상을 떠날 무렵, ‘굴욕당한 천재’라는 이미지는 큰 공감을 얻었다. 출중한 실력에도 반공·반중적 환경 탓에 서구 과학계에서 끝내 온당한 인정을 받지 못한 중화의 과학 영웅. 이러한 기술 민족주의적 페르소나는 결핍된 자존감을 어루만졌다. 첸쉐썬 찬양이 2010년대 중반부터 사그라든다는 점은 공교롭게도 ‘토종’ 과학자 투유유가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2015년과 시기적으로 부합한다. 이렇게 생애 말년과 사후에 걸쳐, 첸쉐썬은 국가와 사회의 필요에 따라 ‘테크노셀레브리티’(techno-celebrity)로 만들어졌다. 이런 테크노셀럽은 앞으로도 중국 과학 굴기의 자신감 유무와 무관하게 지속해서 강화·재생산될 수 있다. 굴기 이전의 중국인에게 매력적인 영웅 서사가 수모를 겪은 천재, 첸쉐썬이었다면, 향후 중국 과학기술계의 자신감이 무르익을수록 그의 이런 페르소나는 옅어질 것이다. 대신 꾸준히 지켜나갈 이미지는 당의 노선에 충성하며 오직 과학기술에만 매진함으로써 국가에 복무하는 탈정치적·도구적 과학기술인의 모습이다. 정치에 침묵하고 ‘본업’에만 충실한 전문가야말로 중국식 권위주의적 기술관료주의가 가장 반기는 ‘모범생’이다. 첸쉐썬의 이름이 가리키는 것은 과학에 대한 존중 그 자체가 아니라 권력 앞에서 과학자가 취해야 할 처세술인지도 모른다. 마냥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에게도 장영실이, 이휘소가, 황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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