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 선관위…분노 넘어 환부 도려내려면 [뉴스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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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석달 사이의 일이다. 대전 안전공업 화재 참사부터 서소문 고가차도 붕괴 사고,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폭발 사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부실 선거 관리 사태까지. 어제의 일이 오늘의 충격으로 덮이는 사건·사고의 연속이다. 망각의 회전율이 너무 빨라 묻고 묻혀 돌아서면 잊힌다. 희생자 빈소에서 눈물을 보이고는 회사 임원 회의에서 유족에게 막말을 퍼붓던 안전공업 대표의 두 얼굴은 한때의 분노와 함께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소문 사고 현장에 쏟아진 정치인들의 질타도 선거용 이벤트로 소비되고 증발했다. 그날들 이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분노와 배설이 새로운 사건·사고로 씻겨 나갔을 뿐이다. 가해자는 이런 망각의 메커니즘이 고마울 따름이다. 망각이 일상화됐다 해도, 선관위 사태는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선거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뿌리다. 선거 관리가 의심받으면 결과가 의심받고, 결과가 의심받으면 당선의 정당성이 시빗거리가 된다. 이런 상황에선 국가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 그 위험성의 경계를 우리는 지금 목도하고 있다. 정치권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2030세대 달래기에 팔을 걷어붙였지만 청년층만의 문제는 아니다. 투표권을 가진, 앞으로 가질, 모든 국민의 문제다. 거리 집회에 직접 나서지 않았다고 문제의식이 없는 유권자로 치부하는 건 착각이다. 모두가 잠자코 엄중하게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선관위 사태는 참정권을 침해한 ‘행정 참사’다. 투표용지 부족에 더해, 투표 결과가 전산에 잘못 입력된 사실은 민의가 왜곡·반영됐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크다. 2024년 총선의 입력 착오까지 뒤늦게 드러났다. 이쯤 되면 암장된 ‘부실 관리’가 더 없다고 단언할 수도 없게 됐다. 개표 신뢰성은 회복이 어려운 타격을 입었다. 나의 한표가 개표 결과에 반영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당선 결과엔 영향이 없었다”는 선관위의 레퍼토리는 부실 선거 관리의 해명이 될 수 없다. 피해자가 죽지 않았다고 폭행이 용인되는 건 아니다. 사실 위기의 징후는 여러차례 있었다. 2022년 3월 ‘소쿠리 투표’, 2023년 5월 고위 간부 자녀 ‘특혜 채용’, 2025년 5월 투표용지 무단 반출까지, 헌법상 독립기관을 이유로 통제의 사각지대에 놓인 선관위 조직 운영에 경고음은 진작 울렸다. 매번 선관위는 “책임 통감” “통렬한 반성”을 되뇌며 “투명한 투·개표 관리”와 “외부 통제 방안 검토”를 요란하게 약속했다. 헌법 기관의 엄숙한 권위와 대법관인 비상임 선관위원장의 비장한 표정에 그 다짐은 모두의 의심을 손쉽게 잠재웠다. 그래 놓고는 독립성을 방패 삼아 외부 감사 요구는 철저히 거부했다. 조직의 폐쇄성은 커졌고, 재발 방지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휴양지로의 외유성 출장, 선거철 업무 회피성 휴직 증가 등은 선관위의 도덕적 해이와 구조적 병폐를 그대로 보여줬다. 선관위가 궁지에 몰릴 때마다 보여온 유감 표명과 대책 발표는 실체 없는 거짓말로 귀결됐다. 그 대가는 컸다. 6·3 지방선거 이후 시민 삶과 밀접한 의제는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선관위 사태 수습에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투입되고 있다. 선관위가 조직 보신을 위해 내부의 불편한 진실을 외면한 대가를 전 국민이 치르는 것이다. 옛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를 다룬 미국 드라마 ‘체르노빌’은 소련 체제의 폐쇄성과 거짓이 어떻게 재앙으로 돌아오는지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과학자 레가소프는 법정에서 정부의 책임을 폭로하며 이렇게 말한다. “진실이 마음에 안 들면 거짓말을 하고 또 한다. 그러다 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거짓을 말할 때마다 진실에 대한 빚이 쌓이고, 머잖아 그 빚은 청산해야 한다. 원자로 폭발이 그 대가다.” 처방은 진단에서 나온다. 선관위 개혁은 내부의 목소리를 듣는 일에서 첫걸음을 떼야 한다. 조직의 곪은 상처는 내부자가 가장 잘 안다. 응징과 비난은 분노를 달래는 가장 직관적 방법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 선관위 개혁을 형사처벌 중심으로 방향을 잡으면 실무자들은 본능적으로 사실을 숨기고 방어적 태도를 취한다. 그들의 입을 통해 구조적 결함을 파악하기 힘들게 된다. 이제 병의 원인을 찾고 환부를 도려내 새살이 돋게 할 시간이다. 선관위가 신뢰를 회복할 때까지 길고 고통스러운 외과 수술이 이어질 것이다. 지금 이대로는 선관위가 다음 선거를 치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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