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도시서 일군 ‘이야기의 숲’ [.txt]
지역 스토리 발굴해온 정은영·강용상씨 부부 새 도전애니메이션·웹툰 클러스터 참여…다른 독립서점들 합류12층 색깔 다른 큐레이션…“창작 영감 주는 공간으로”지난달 26일 저녁, 전라남도 순천의 낯선 책방에 비를 뚫고 온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앉았다. 사위가 어두워질수록 천장에 은하수를 형상화한 조명은 더욱 빛났다.
지난 3월 말 문을 연 순천 책방 ‘나무들의 밤’이 지역 명소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경남 통영에서 작은 출판사 ‘남해의봄날’과 작은 서점 ‘봄날의 책방’을 운영해온 정은영 대표와 건축가 출신의 공간 기획자 강용상씨 부부가 함께 만든 곳이다. 두 사람은 순천 원도심의 오래된 건물을 1년 동안 개보수해 7000권의 책을 갖춘 아름다운 중형 서점 겸 책 문화공간으로 바꾸었다.
두 사람은 서울 토박이다. 디자인 잡지 기자 출신으로 서울 홍대 앞에서 8년 가까이 브랜드 스토리텔링 회사를 운영하며 입지를 다져가던 정 대표는 서른아홉에 번아웃을 겪고 통영으로 향했다. 찬란하게 빛이 부서지는 남해의 풍광과 수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지역 서사에 반해 그곳에 뿌리를 내렸다. 1년만 살아보자 했다가 어느덧 15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출판사와 책방을 운영하며 그야말로 한바탕 ‘봄밤의 꿈’ 같은 시간을 보냈다. 출판사 ‘남해의봄날’은 2012년 이후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우리가 사랑한 빵집 성심당’, ‘마녀체력’ 등 94권의 책을 냈다.
처음엔 외로웠고, 나중엔 폐업 위기도 겪었다. 2017년 2월,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을 내고는 급기야 문 닫을 각오까지 했다. 그런데 그때 기적이 벌어졌다. 갑자기 하루 1000부씩 주문이 쏟아졌다. 한겨레 등 언론에서 책을 크게 소개했고, 영국 방송국 비비시(BBC)도 이미경 작가를 인터뷰하면서 책이 널리 알려진 것이다. 이 책은 시리즈로 나오며 10만부가 넘게 팔려나가 프랑스, 대만, 일본에도 수출되었다. 통영의 작은 출판사는 점점 ‘전국구’가 되었다.
“지역의 스토리를 세련되게 구현하고 퀄리티 있게 결과물을 보여주겠다는 오기를 품었습니다. 예컨대 서울의 디자이너들은 통영의 장인들에게 좀 더 세련된 디자인과 모던한 창작물을 협업해서 만들자고 제안하죠. 저희도 그런 시도를 했지만 그건 장인의 정체성을 위반하는 거였어요. 장인은 전통 계승자이고, 새로운 것보다 지금까지 해왔던 디자인을 작업할 때 가장 빛나는 사람이었어요.”
미학적인 전환, 깨달음을 얻었다. 지역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소개하며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았지만 너무 오래 한곳에 머물렀다는 생각도 들었다. 부부는 경주, 전주, 순천 등 곳곳에서 한달살이를 하면서 옮길 곳을 탐색했다. 고심 끝에 여러 지역 중 순천으로 낙점했다. 순천만을 품은 생태도시의 아름다움, 통영과 한시간 반 거리라는 지리적 조건, 고속철이 다니는 도시라는 교통의 이점도 좋았다.
부동산을 찾았지만 지대가 너무 비싸 머리를 싸매던 때, 또다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순천시가 원도심 상권에 ‘애니메이션·웹툰 클러스터’를 만든다고 했다. 두 사람은 “콘텐츠 생산자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창작의 기지가 있어야 한다”고 비전을 제시했다. 까다로운 심사를 거친 뒤 30여개 기업 중 하나로 선정되어 4층 건물 3개 층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기적을 상생의 기회로 만들었다.
‘순천 지사’를 갖게 되면서 건축가 겸 가구 디자이너 출신 강용상씨가 ‘본업’으로 돌아가 맹활약했다. 그는 ‘나무들의 밤’ 대표가 되어 본격적인 공간 기획자의 역량을 보여줬다. 통영에서 ‘봄날의 책방’을 만들었던 솜씨를 살려 공간을 디자인했다.
“책방도 도시설계와 비슷합니다. 7000권의 책들을 전시할 수 있도록 구상하고, 책등과 표지가 보이는 면의 비례를 고려해서 가구 디자인을 오래 했어요. 통영 ‘봄날의 책방’이 여행자들을 위한 곳이었다면 ‘나무들의 밤’은 전남권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콘텐츠 생산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강용상)
협력도 이어졌다. 강 대표는 순천에서 인문·예술 서적을 주로 소개해온 독립서점 ‘골목책방서성이다’의 조태양 대표와 독립출판물에 강점을 보인 ‘책방 심다’의 김주은 대표를 설득했고, 두 사람도 기꺼이 주주 겸 이사로 힘을 보탰다. ‘심다’는 지난 2월, 책방 창립 10년을 맞아 문을 닫는 ‘졸업식’을 했는데, ‘나무들의 밤’에 다시금 ‘심다’가 키워오던 독립출판물의 문화적 유전자를 이식하게 됐다. ‘서성이다’의 조 대표는 기존 책방을 운영하는 동시에 이곳에서 문학·인문 큐레이터를 맡았다. ‘남해의봄날’이 큐레이션한 1층 ‘봄밤’ 구역은 아트북과 예술서, 종교와 생명, 로컬라이프, 음식, 정원, 여행 등에 대한 영감을 주는 공간이고, 2층 ‘가을밤’은 조 대표가 큐레이션한 문학, 인문, 사회, 생태, 과학 서가로 꾸몄다. 같은 층의 ‘여름밤’은 김 대표가 독립출판, 그래픽노블, 청년과 아동 도서를 배치했다. 순천 지역 청년들은 책방지기로 선발돼 함께 일하고 있다. 귀한 인연을 맺으며 계획이 착착 진행되었지만 ‘지역 소멸’과 ‘출판 위기’라는 흐름에 발걸음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저희가 통영으로 이주했던 2010년대만 해도 ‘지역’이 이렇게까지 소외되지 않았어요. 서울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고, 통계로도 지역의 삶을 희망적으로 보는 신호가 있
📌 Kayn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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