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 이어 이석규의 죽음…거제 조선소에서 펜끝을 세웠다
최루탄 파편이 박혀 피 흘리며 쓰러지는 이한열을 학우가 부둥켜안은 사진 한장은 국민의 심장에 박제되었다. 분노해서 광장으로 나온 시민들도 매일 최루가스로 뒤덮였다. 눈가에 치약을 묻히고 운동화 끈을 야무지게 조인 시위 행렬이 도로를 달리면 서울 종로와 명동의 사무실 창가에서 흰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팔을 내밀어 있는 대로 흔들었다. 그들이 던져주는 두루마리 휴지가 하얗게 벽을 타고 내려와 시민들의 얼굴에 얼룩진 최루를 닦아냈다. 군중은 점점 늘어났고 흰 셔츠들도 문을 박차고 달려 나왔다.
결국 6월29일 전두환의 적자인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간선제 대통령 선거를 폐지하고 직선제를 보장하는 개헌을 하겠다’ 선언했다. 그렇게 치러진 그해 12월의 선거 결과는 차치하더라도 직선제는 열사들의 피와 시민들의 분노로 이루어 낸, 직접 투표 쟁취였다.
그해 7월9일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의 ‘민주 국민장’은 서울에서만도 100만명의 인파가 몰려나와 신촌 일대와 애오개 육교 위, 광화문까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이날, 문익환 목사는 혼신을 모아 한명 한명 민주열사들의 이름을 불렀다. 전태일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김경숙 열사여! 박종철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메아리가 시민들의 머리 위로 전류처럼 퍼졌다. 당시 한국 노동자복지협의회의 홍보담당자로 아침 일찍부터 연세대 정문 밖에 한 자리 잡고 서 있던 내 머릿속으로도 번개가 지나갔다.
울산의 현대엔진, 현대미포조선 등을 선두로 타오른 노동자들의 권리 쟁취 투쟁은 부산, 마산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광산업, 운수업 등 업종을 망라해 들불처럼 퍼졌다. 당시 온갖 구호가 하늘 높이 펄럭였지만, 주요 쟁점은 ‘민주노조 쟁취’, ‘어용노조 타파’였다.
거제도 대우조선도 예외 없었다. 이미 그해 1월부터 현장에서는 회사의 부당한 행태 들을 고발하는 ‘상고문’이라는 유인물이 주기적으로 배포되고 있었다. 회사는 주모자를 찾아내어 부서 이동, 파견, 해고 등의 조치를 단행했지만, 더는 봉합하고 억눌러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젠가 대우조선에서 노동자 가족을 공장으로 초대해 작업장 견학을 시켜 준 적이 있었다. ‘골리앗’이라 부르는 거대한 크레인에 아슬아슬한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 보기도 하고 도장, 용접, 탑재, 철판 절단 작업장들도 둘러보았다. 그날 노동자의 아내 가운데 어떤 이는 집에 돌아가 통곡했다고 한다. 한발만 삐끗하면 시커먼 바다 귀신이 될 수도 있고, 뙤약볕에 달궈진 철판은 0.01㎜만 잘못 잘라도 쓸 수 없으며, 삼복 더위에 우주인처럼 방진복을 겹겹이 입고 눈만 빼꼼한 남편들이 피부 연고를 들고 다니며 일하는 작업장 안을 처음 본 것이다. 남편이 최고의 배를 만들어 낸다는 자부심보다는 고된 노동에 대한 연민이 사무쳤다는 고백이었다. 1988년 초 나는 자취방 짐을 꾸려 거제도로 향했다. 능포 바닷가에 작은 방 하나를 세 얻어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역사와 과정을 청취하고 기록했다. 노동조합의 지원을 받아 대우조선의 현장도 구석구석 돌아볼 수도 있었는데 그때 통곡했다는 가족들의 심정이 사무치게 전해졌다.
그 가족들이 공장을 견학한 시기는 노동조합이 자리를 굳혀 예전에 견주면 훨씬 나아진 때다. 이전엔 작업 중에 사용하던 석필, 토치 바늘, 줄자, 심지어는 헌 면장갑을 뒷주머니에 꽂고 무의식중에 퇴근하다 적발되어도 ‘회사 물품 절도’라며 단칼에 해고되기도 했다. 작업 상태를 감시하는 ‘인사 기강’의 오토바이는 공포였고 ‘경영합리화’를 앞세운 해고 위협은 불안이었다. 눌러둔 분노가 1987년 여름 활화산으로 터져 나왔다. 최루탄의 독한 가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옥포, 장승포 등 노동자 밀집 지역은 투쟁 대열이 지날 때면 가족들이 음료수와 물을 공급해 주며 뒤따랐다. 아이를 업은 부녀자들도 구호를 외쳤다. 시위 차량이 마이크로 방송을 하면 사원 아파트의 가족들이 발코니로 몰려나와 화답했고 립스틱과 아기 기저귀로 쓰는 천을 창밖으로 던져주기도 했다. 립스틱은 매직 대용으로, 흰 천은 펼침막으로 사용되었다.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보름여를 밤낮없이 노사 단체교섭이 진행 중인 옥포관광호텔 앞 사거리로 집결했다. 협상은 지리멸렬했다. 습도와 아스팔트 열기로 숨이 차는 한여름, 8월22일이었다. 협상이 거듭 결렬되었음을 확인하며 대열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대우 소속 호텔이어서 경영 주체들이 그 안에 있었다.
들어가려는 노동자들과 막아서는 전투경찰의 실랑이가 벌어지며 바닷가로 밀려났다 다시 모여들기를 반복했다. 대치가 이어지던 오후 1시30분, 평화시위만큼은 보장하겠다던 경찰이 돌변했다. 강경한 기류가 흐르면서 불시에 휘몰아친 최루탄 파편이 한 노동자의 심장을 뚫었다. 스물한살 이석규, 남원 출신, 대우조선 대조립부 외업반. 푸른 작업복이 피에 젖고 아스팔트 위에 신발이 나뒹굴었다.
비보를 접한 이소선 어머니, 이상수 변호사, 노무현 변호사 등이 달려왔다. 장지를 광주 5·18 민주 묘역으로 하자는 노동자 쪽과, 고향인 남원으로 하겠다는 유족 대표 간의 논의가 오래 걸렸으나 광주로 합의했다. 영결식과 노제를 마친 뒤 대형버스 28대에 1500여명을 태운 장례 행렬이 걸음을 뗐다. 의아하게도 취재하던 기자들이 방독면을 쓰고 영구차보다 30여분 앞서 출발하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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